인도네시아산 니켈을 두고 미국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그동안 지정학적 갈등에서 벗어나 있던 인도네시아가 지금은 전기차 배터리 핵심광물 생산의 중심지가 되면서 새로운 무역 분쟁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니켈 매장량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는 2020년 기준 세계 니켈 생산량의 약 30%를 차지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이런 인도네시아를 빗대어 ‘니켈의 사우디아라비아’라는 표현을 썼다. 문제는 인도네시아가 2020년부터 니켈을 원광 형태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점이다. 대신, 국내에 제련소를 대거 지어 니켈 제품 형태로 가공한 뒤 수출하도록 했다. 니켈 원광을 원하는 해외기업들에게 투자를 요구하는 방식이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적인 니켈 수요 증가를 적극 활용, 자원 내셔널리즘을 통해 자국경제를 부흥시키고자 수출규제 카드를 일찌감치 꺼내들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가 가진 다양한 전략자원을 원자재 형태 그대로 수출하기 보다는 자국 내에서 고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도록 다운스트림 산업을 육성코자 2020년 1월부터 니켈을 필두로 원석 형태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올해에는 석탄, 팜유, 그리고 내년에는 보크사이드 등 전략자원 수출규제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니켈 수출금지 조치는 자국 내에서 생산된 니켈이 원광 형태로 바로 해외로 수출하는 것을 차단하며, 자국 내에서 제련된 제품 형태만 수출을 허용해주는 규제조치이다. 이러한 규제조치는 전기차에 필수적인 니켈 자원에 대해 채굴부터 가공까지 인도네시아 본토에서 한 번에 이뤄지는 공급망 생태계 구축을 위한 의도로 판단되고, 향후 전기차 배터리 생산 등의 고부가가치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미래먹거리 육성을 위한 발판이자 인도네시아를 동남아시아의 전기차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WTO, 인도네시아 협정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위반 패널보고서 작성 WTO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원광 형태 수출금지’, ‘의무적으로 자국 내에서 제련된 니켈에 대해서만 수출 허용’ 등의 조치가 모두 협정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대한 위반이라 패널보고서를 통해 명시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는 분쟁해결기구(DSB)를 통해 항소의사를 밝혔으며, 조코 위도도 대통령도 니켈 원광 수출금지 이후 인도네시아 내에서 직접 제련된 니켈 제품만이 수출 가능해짐에 따라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이 늘어 국가에 크게 이익이 되었다”라며 “니켈 관련 수출규제를 풀 생각이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2022년 8월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니켈 가공제품에 대해서 수출세 부과를 검토하고 있다며, 니켈에 대한 수출 규제의 범위를 확대해 나갈 것임을 암시했다.
IMF는 지난 6월 “원자재 수출을 금지하면 다자간 무역 시스템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라며 인도네시아에 수출제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폐지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인도네시아의 아이르랑가 하르타르토 경제조정장관은 “외국이나 국제기구가 다른 국가의 수출 정책을 통제하려는 시도이자 현대판 식민주의에 해당한다”라고 비평하며 반발하고 나섰다.
최근 인도네시아는 세계 니켈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넓히고 국제 니켈 가격 및 생산량 통제하기 위해 국제 니켈 유통구조를 자국 중심으로 바꾸기 위한 ‘국제 니켈 카르텔’ 설립을 공식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즉, 니켈 최대 생산국인 인도네시아가 호주, 캐나다 등 주요 니켈 생산국들과 손을 잡고 석유수출국기구(OPEC)과 유사한 형태의 니켈생산국 기구를 설립하여 국제 니켈시장을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의도이다. 3국의 연간 니켈 생산량이 2021년 기준 129만 톤으로 전 세계 생산량의 약 48%를 차지하고 있어 해당 기구가 설립된다면 국제 니켈 유통구조에서 인도네시아가 미치는 영향력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미국보다 니켈의 전략적 중요성과 인도네시아의 중요성을 먼저 확인 중국은 인도네시아 니켈 확보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로 꼽힌다. 중국기업들은 인도네시아에 약 14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고, 중국 투자로 인도네시아는 일자리를 창출해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중국 관리들과 기업들은 전기차 시대를 맞이하며 니켈의 전략적 중요성과 인도네시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확인했다. 중국기업들은 고질적인 부패와 느슨한 환경규제, 작업장 안전 기준에 대한 고려 없이 신속하고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반면, 미국은 전기차 공급망에서 인도네시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한발 늦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미국은 인도네시아 투자에 적극적이지 않다. 미국 정부로서도 셈법이 복잡하다는 뜻이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IRA법 시행 이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제안했다. 니켈과 구리, 알루미늄 등 인도네시아산 광물로 만든 배터리로 장착한 전기차도 IRA에 따른 세액 공제 혜택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IRA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이나,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생산된 광물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해야 한다. 일본은 미국과 일종의 광물 FTA인 ‘핵심광물 공급망 강화 협정’을 맺어 돌파구를 마련했다. 자국산 광물을 IRA 적용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미국은 FTA를 체결하지 않은 영국·유럽연합(EU)과도 유사한 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제안에 미국의 입장은 뚜렷하지 않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이면에는 동맹국 위주의 산업 공급망 재편 의도가 있다는 것쯤은 이젠 누구나 다 안다. 쉽게 말해 러시아와 중국을 세계에서 고립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계 최대 니켈 매장 보유국가에 중국의 거대 자본이 들어갔으니 인도네시아산 니켈을 수입하거나 배터리에 투입하게 되면 상당부분은 중국기업들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셈이다. 전기차 확대를 위한 광물은 필요한데, 광물 대부분을 중국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다. 인도네시아의 FTA 제안에 불편한 기류 정도만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니켈 수급 안정화가 필요한 국내기업 불리해 국내 기업들의 입장도 곤란하다. 국내 배터리의 경쟁력으로 꼽히는 고성능, 고용량은 하이니켈 양극재에서 나온다. 그만큼 니켈 수급 안정화가 필수적이라는 뜻이어서 국내 기업들과 산업부도 인도네시아와 협력에 나섰는데, 국내 기업들이 가장 눈독들이는 인도네시아산 니켈에 미국이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서다.
국내 배터리업체들은 현지 진출 계획을 내놓고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인도네시아에 니켈 제련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인도네시아 할마헤라섬 웨다베이 공단에 약 6000억 원을 투자해 2025년부터 연 5만2000톤 규모의 니켈 중간재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LG화학, 포스코홀딩스, LX인터내셔널, 중국 화유코발트는 지난해 LG컨소시엄을 꾸리고 인도네시아 카라왕 지역에서 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 사업은 광물 채굴부터 제련·정제 과정을 거쳐 전구체·양극재를 거쳐 최종적으로 배터리 완제품까지 생산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프로젝트 규모는 약 12조 원이다.
최근에는 STX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지역 니켈 광산의 지분 20%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STX는 이번 계약을 통해 매장량 2억톤 이상인 술라웨시 광산에서 생산되는 니켈 전량을 운송·판매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광산 지분을 최대 49%까지 확대할 수 있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긍정적인 액션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도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등을 핵심광물 협정 대상에 추가해달라고 미국 측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란? 기후변화 대응, 의료비 지원, 법인세 인상 등을 골자로 한 미국의 법으로, 급등한 인플레이션 완화를 위해 2022년 8월 16일 발효됐다. 특히 이 법에서는 전기차 구매 시 보조금(세액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전기차 제조에서 중국 등 우려 국가의 배터리 부품과 광물을 일정률 이하로 사용하도록 해 전기차 가치사슬에서 중국을 배제함과 동시에 미국 내 급등한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마련된 법이다. 이 법안은 2022년 8월 7일 미국 상원에서 가결된 후 8월 12일 하원을 통과한 데 이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월 16일 법안에 서명하면서 발효됐다. <저작권자 ⓒ 경제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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